이번장에서는 1980년대 후반기 일본에서 전개된 거품경제는 이런 점을 완벽히 설명하고 있고, 1990년대에 아시아 기적의 거품도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일본 거품
1980년대 말까지 일본의 토지 가격은 도쿄의 황실공원이 캘리포니아 주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해질 정도로 상승했었습니다. 부동산가격이 일본 거품경제의 유일한 증거는 아닙니다. 보편적으로 주가는 100배 이상의 주가수익률로 거래되었습니다. 니케이 지수는 1989년에 3만8000 이상의 정점에 도달했으나, 거품이 빠지면서 9000이하로 하락 하였습니다.
분명히 자산가격은 비이상적으로 급등했었습니다. 급증한 신용팽창은 천정부지의 자산가격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브레튼 우즈 시스템의 붕괴 이후 몇년 동안 축적된 전례 없는 일본의 무역흑자가 신용팽창을 가능케 했습니다. 흑자가 은행 시스템에 예치됨에 따라 통화 공급은 현저히 확대되었고, 경제 성장이 가속화되고 자산가격은 급상승 했었습니다.
일본은 1960년대 후반까지 주요한 수출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2차 세계대전의 패전에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또다시 강력한 산업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증가하는 대외 준비금은 일본의 수출 주도 성장전략에 대한 성공의 증거였습니다. 1970년대에 두번의 오일쇼크로 일본의 무역흑자가 다소 변동되었으나 1981년 이후로는 끊임없는 무역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무역흑자가 일본의 은행 시스템에 예치됨에 따라 예치금은 고성능 통화로 작용했고 신용창조의 폭증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일본의 무역흑자를 1980년대의 흑자와 비교하면 1980년에는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의 규모와 1960년대 말의 통화잔고에 비교하면 매우 의미 있는 것이였습니다. 더구나 이 기간에 일본은 순 자본유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순자 자본 유입은 국제준비금을 늘렸을 뿐만 아니라 예금 형태로 은행 시스템에 들어와 통화 공급의 증가와 신용창조에 공헌했습니다.
1968년~78년 일본의 국제준비금(총 준비금-금)은 1,1145퍼센트나 급증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통화 공급(통화+준통화)은 356퍼센트까지 증가했습니다.
따라서 1980년대 초에 대규모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불균형의 시기가 시작되었을때 일본의 통화 공급은 이미 빠른 속도로 10년동안 확대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977년이 되서야 일본은 더 상세한 국제수지 목록을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세부항목으로 인해 외국자본이 국가에 얼마나 유입되고 유출되었는가를 정확히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가 엄청난 속도로 확대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 일본은 경상수지 흑자와 거의 같은 정도의 자본을 수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본 수출(투자수지 적자로 나타남)이 경상수지 흑자만큼 커지는 한, 국가 전체의 국제수지는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일본이 보유한 국제준비금이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는 것을 의합니다.
그러나 1986년~88년처럼 자본수출이 경상수지 흑자를 상쇄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는 종합수지가 흑자로 나타나게 되어 국제준비금이 증가하는 원인이 됩니다.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를 상쇄하기 충분한 자본수출에 대한 무능력은 일본의 국제준비금을 1985년 말과 1988년 말 사이에 260퍼센트까지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본 내로 유입되는 통화가 유출되는 통화보다 더많을 때 ,통화 공급 증가율이 이 기간에 가속화되어 1970년대 이래 가장 빠른 증가율을 보여준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1989년애 준통화는 15퍼센트나 증가했는데, 이는 지난 1975년에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성장률이였습니다. 여러해 동안의 무역흑자 이후 국제준비금 증가, 통화 공급의 팽창,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 이러한 모든 요소들의 급변은 1980년대 후반 일본 경제의 과도한 경기과열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2편은 이어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