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에 가득 둘러싸이는 날, <드래곤볼>의 전투력 측정기인 ‘스카우터’가 있으면 어떨까. 스카우터는 반쪽짜리 안경에 유리 대신 투명 디스플레이가 달려 디스플레이 너머 상대방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전자 정보를 볼 수 있는 장치다. <드래곤볼>에선 스카우터에 천적의 공격력만 나오지만, 현실계에선 꼰대력과 취향 같은 성향이 표시되면 좋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빠르게 성향을 파악해 친해질 사람인지, 당장 도망쳐야 할 사람인지 판단하는 거다. 이런 욕망을 느끼는 게 한두 명은 아닌지 MBTI 류의 성격 검사 테스트 결과를 공유하고 비교하는 일이 벌써 2년째 유행이다.
‘성향 스카우터’는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는 비현실적인 장치 같지만, 소재 면에서는 가능성 이 있는 후보가 있다. 바로 ‘그래핀’이다. 그래핀은 투명하고 얇으며 가벼우면서도 전류가 흐르는 특징이 있는 신소재다. 이런 면 때문에 ‘스카우터’와 같은 투명 디스플레이를 만들 대표적인 소재 후보로 꼽힌다. 그래핀의 장점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특수 섬유와 접는 컴퓨터 등 SF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장치를 만들 가능성이 있어 별칭이 ‘꿈의 소재’다.
그래핀은 투명 디스플레이를 만들 수 있는 신소재로 꼽힌다. 사진은 투명 디스플레이의 상상도. 출처 : Martic Eckert(플리커)
그러나 이런 별칭은 그래핀의 두 가지 얼굴을 모두 함의한다. 하나는 꿈꾸던 장치를 만들 수 있는 신소재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상용화하기엔 한계가 많아 여전히 ‘꿈’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최근 과학기술계는 그래핀을 ‘꿈’에서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갖가지 연구를 하고 있다. 그중 주목할 만한 연구가 국내에서 나왔는데, 세계 최초로 결점 없는 그래핀을 만들었다는 거다. 그래핀이 무엇이길래 여전히 상용화하기 어려울까? 또, 무결점 그래핀을 제작했다는 건 어떨 의미가 있을까. 이 글에서 살펴본다.
가벼운 방탄복, 말랑한 전자기기...
그래핀으로 가능하다
그래핀을 화학적 측면에서 설명하면, 탄소 원자들이 벌집 모양을 이루며 이어지는 2차원 물질을 말한다. 보통 ‘그래핀’이라고 하면 벌집 구조를 이루는 하나의 층만을 의미하지만, 때로는 두 개의 층으로 이뤄진 그래핀(bilayer prahene)이나 복수의 층으로 이뤄진 그래핀(multilayer graphene)을 함께 뜻하기도 한다. 하나의 층은 원자 하나의 굵기에 불과할 정도로 얇은데, 그 두께는 0.3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정도이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가 6각형을 이루며 이어지는 물질을 말한다. 하나의 탄소 원자는 세 개의 탄소 원자와 결합한다. 출처 : AlexanderAlUS(위키미디어)
이처럼 얇은 물질임에도 불구하고 탄소 원자끼리 결합하는 세기는 굉장히 크다. 탄소 원자들이 전자를 공유하는 ‘공유결합’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공유결합은 여러 화학 결합 중에서도 세기가 으뜸가는 종류다. 이런 탓에 그래핀의 강도는 단단하기로는 우주에서 손꼽히는 물질인 다이아몬드를 뛰어넘을 정도이며, 같은 얇기의 강철보다는 200배 높다. 가벼운 데다 강도가 강한 점은 <아이언맨> 등 SF영화에 등장하는 방탄복의 소재 후보로 꼽히는 이유다.
그래핀의 또다른 장점은 ‘전기전도성’이다. 전기전도성이란 전류가 잘 흐르는 정도를 의미한다. 그래핀의 전기전도성은 구리보다 100배는 뛰어나다. 구리도 금속 중 전기전도성이 좋은 편이라 전선의 주요 재료로 쓰이는데, 이보다도 그래핀이 뛰어난 것이다. 이런 이유는 두 탄소 원자가 공유하는 전자 중 일부가 그래핀 전체를 자유롭게 다니기 때문이다. 이 전자가 움직이면 전류가 흐른다.
그래핀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점은 신축성이 좋고 잘 휘어진다는 점이다. 대부분 금속은 형태가 잘 변하지 않으며 구부리려고 하면 휘기보다는 깨진다. 이런 탓에 금속으로 만든 전자기기는 대부분 딱딱하고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래핀은 전기전도성이 대부분 금속보다 좋으면서도 표면을 20% 늘려도 끄떡없을 정도로 신축성이 좋고, 휘어져도 전기 전도성을 잃지 않는다. 터치 기능이 있는 의류 등 웨어러블 기기에 대표적인 후보 소재로 그래핀이 꼽히는 이유다.
세계 최초 그래핀,
스카치테이프로 얻었다?
이처럼 다양한 장점으로 과학기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래핀의 역사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핀에 대한 이론은 1947년 이론물리학자 P. R. 월러스가 처음 제시했다. 월러스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연필심의 재료인 ‘흑연’을 연구하다 그래핀을 언급했다. 왜 하필 흑연이냐면, 흑연이 바로 그래핀을 세로로 층층이 연결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그래핀보다 흑연을 먼저 접했기 때문에, 그래핀이라는 이름도 흑연에서 왔다. 1986년 화학자 한스 피터 보엔과 그의 동료는 흑연이라는 뜻의 ‘graphite’에 ‘ene’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여기서 ‘ene’은 벤젠처럼 분자가 육각형 구조를 이루는 탄화수소 물질을 의미한다. 그래핀이 흑연의 일부이면서도 탄소가 벌집 모양을 이룬다는 뜻이 이름에 담겨있다.
이렇게 그래핀에 대한 이론이 나오고 이름이 생기는 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그래핀을 흑연에서 분리해 직접 확인하기를 바랐다. 이를 최초로 성공한 것이 2004년인데, 예상과 달리 매우 단순한 방법을 통해서였다. 스카치테이프를 몇 번 붙였다 떼었다 한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 유명한 실험은 영국 맨체스터대학교의 한 실험실에서 벌어졌다. 물리학자 안드레 가임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있던 이 실험실은 금요일 저녁마다 평소 연구와 관련이 없는 실험을 해야 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날은 “세상에서 가장 얇은 물질을 만들어 보자”는 목표로 스카치 테이프에 흑연을 붙인 뒤 테이프를 붙였다 뗐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한 층의 그래핀이 분리되고 ‘말았다’.
그래핀을 연구했던 실험실에서 웃고 있는 안드레 가임의 모습. 출처 : cellanr(위키미디어)
두 과학자는 이 실험으로 2010년 노벨상을 받았다. 물론 그래핀 조각을 분리해낸 것만이 아니라, 그래핀의 물리적 성질을 연구한 성과가 업적으로 인정됐다. 연구팀은 실리콘으로 만든 기판에 1개 층으로 이뤄진 그래핀을 붙였다. 그러자 그래핀과 실리콘이 광학적인 상호작용을 해 일반적인 광학 현미경으로도 그래핀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핀을 관찰한 결과로 연구팀은 그래핀에서 전자가 매우 활동적이라는 걸 보였다. 그래핀이 미래 전자기기의 소재 후보가 되는 데 큰 몫을 한 것이다.
그래핀, 대량생산 어려운 게 문제
가임 연구팀이 한 것처럼 흑연에서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그래핀을 한 장씩 떼어내는 방식을 ‘기계적 박리법’이라고 한다. 어렵게는 ‘미소 물리적 박리법’이라고도 부르고, 쉽게는 ‘스카치 테이프 방법’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방법의 단점은 면적이 넓은 그래핀이나 많은 양의 그래핀을 생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즉, 상용화의 핵심인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그래핀 생산법이 개발됐다. 그중에서 주목받는 방법 하나가 ‘화학기상증착법(CVD)’이다. CVD의 첫 번째 단계는 탄소를 포함한 여러 기체가 고온에서 화학 반응을 하면서 시작된다. 화학 반응으로 분리된 탄소는 주변에 있던 금속 기판에 붙어 그래핀을 형성한다. 그래핀이 만들어지고 나면 이 금속 기판을 녹여 그래핀만 떼어내면 된다. 이런 CVD는 기계적 박리법에 비해 그래핀의 면적을 비교적 넓게 생산할 수 있다. 가로·세로 길이를 몇 cm 수준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문제는 있다. CVD의 가장 큰 단점은 생산된 그래핀에 결점이 생기기 쉽다는 점이다. 먼저 그래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원하지 않던 물질이 붙어 티끌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휴대폰 액정에 필름을 붙일 때 티끌이 붙는 것처럼 말이다. 또는 온도를 높이거나 내릴 때 금속의 부피가 팽창하고 줄어드는 과정에서 금속 기판에 붙은 그래핀이 접힐 수 있다. 너무 얇다보니 탄소가 여러 층으로 겹쳐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티끌과 접힘, 적층 현상은 CVD 공정에서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결점이다. 이런 결점은 그래핀의 성능을 떨어뜨린다. 그래핀으로 만든 제품이 전기적 성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 거나, 접힘 부분에 균열이 발생해 강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국내 연구진,
무결점 그래핀 만들다
따라서 기초과학연구원 다차원 탄소 재료 연구단장 로드니 루오프 공동연구팀이 무결점 그래핀을 만든 건 고성능 그래핀 상용화를 향해 한 걸음 내딛은 성과라 할 수 있다. 8월 26일 연구팀은 적층과 접힘이 없는 그래핀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됐다.
해당 연구팀은 이전에 발표했던 연구에서 적층은 없지만 접힘은 있는 그래핀을 개발했다. 당시 연구팀은 구리로 만든 금속 호일을 기판으로 사용해 CVD 공법으로 그래핀을 만들었다. 그 결과, 그래핀에 나타난 접힘은 3개 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길이는 10~100nm로 다양했다. 이런 접힘 현상은 50~100micron 간격으로 평행하게 나타났다.
연구팀은 오랜 연구 끝에 접힘 현상이 기판으로 사용된 금속을 식히는 과정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속은 고온에서 팽창했다가 식을 때 다시 수축한다. 이때 금속이 수축하는 비율에 비해 금속 기판에 붙은 그래핀은 충분히 수축하지 않았다. 그래핀이 충분히 작아지지 않았으니, 남는 면적 일부가 접히는 것이다.
연구팀은 다양한 온도에서 그래핀을 만드는 실험을 반복해 접힘 현상이 일어나는 온도를 찾기로 했다. 아르곤 기체가 있는 상태에서 탄소를 포함하는 물질인 에틸렌과 수소를 섞어 고온에서 화학 반응을 일으키고, 구리와 니켈로 직접 만든 포일을 금속 기판으로 사용했다. 실험을 반복한 결과, 그래핀의 접힘 현상은 온도가 765℃ 이상일 때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관찰됐다.
금속 기판의 열을 식힐 때 그래핀에 접힘 현상이 일어난다. 출처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이에 연구팀은 접힘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765℃ 이하에서 그래핀을 만들 수 있도록 실험 도구를 최적화 했다. 금속 기판을 새로 만들고, 화학 반응에 참여하는 기체도 최적화한 것이다. 그 결과, 금속을 냉각시키는 과정을 거쳐도 접힘과 적층이 모두 없는 무결점 그래핀이 합성된 것을 확인했다.
그래핀 상용화로 한 걸음 더
이번에 개발된 그래핀은 전기적 성능도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하 이동도’가 실리콘과 비교해 7배였고, 기존 그래핀보다는 약 3배 높았다. 전하 이동도란 소재 내부에서 전자 등이 움직이는 빠르기를 말한다. 전하 이동도가 낮으면 같은 전력으로도 제품의 성능이 떨어지며, 디스플레이 등에서 색상 변환이 느려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무결점 그래핀의 뛰어난 전기적 성능은 접힘과 적층이 없는 덕에 소재의 위치나 방향에 관계없이 일정한 효율을 낼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팀은 무결점 그래핀이 대량으로 생산될 수 있다는 점도 보였다. 금속 포일을 평행하게 여러 개 쌓았을 때 그래핀 여러 장이 동시에 생성된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연구팀은 이런 방법으로 가로 4cm, 세로 7cm크기의 무결점 그래핀 5장을 동시에 만들었다. 게다가 금속 포일을 5번 재사용해도 중량 손실이 0.0001g에 불과해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점도 보였다.
앞으로 과제는 무결점 그래핀의 더 많은 장점을 발견해 산업에 응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루오프 단장은 “새로운 금속 기판을 개발하고 적층과 접힘 문제를 해결하는 등 무결점 그래핀을 개발하기 위해 7년간 연구한 끝에 결실을 맺었다”며, “앞으로 무결점 그래핀의 독특한 물성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이 만든 접힘과 적층이 없는 무결점 그래핀의 모습. 광학 현미경(왼쪽)과 전자 현미경(오른쪽)에서 결함이 없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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